이별의 영시 – 이학춘 –
이학춘의 ‘이별의 영시’는 1971년 6월 1일 성음제작소에서 발매된 ‘이학춘·신행일 – 이별의 영시 / 선술집’의 대표곡이다. 음반번호는 DG-가-39. 이철수가 노랫말을 쓰고 허현이 곡을 만든 것으로 전하는 작품으로, 이 노래를 살펴보다 보면 뜻밖에도 같은 해 배호가 불러 널리 알려진 ‘영시의 이별’과 맞닿는다. 제목만 비슷한 두 곡이 아니라, 이학춘의 선행곡을 바탕으로 가사 일부와 곡을 손질해 배호의 노래로 이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음제작소 음반번호 자료에는 DG-가-39가 ‘이학춘 신행일 [이별의 영시 / 선술집]’으로 기록돼 있으며 발매일은 1971년 6월 1일로 정리돼 있다. ManiaDB 이학춘 자료에서도 ‘이별의 영시’를 1971년 성음에서 나온 이학춘의 대표 음반과 연결하고 있다.
이학춘 ‘이별의 영시’, 성음 DG-가-39의 첫 곡
당시 실물 LP를 확인할 수 있는 LP갤러리 원반자료를 보면 이 음반은 이학춘과 신행일을 중심에 두면서 다른 가수들의 노래도 함께 넣은 합동음반이었다.
- Side A 1. 이학춘 – 이별의 영시
- Side A 2. 이학춘 – 사랑의 돌부처
- Side A 3. 이학춘 – 괴로워도 웃으며
- Side A 4. 임희숙 – 그 사람 떠나가고
- Side A 5. 이정화 – 싫어
- Side B 1. 신행일 – 선술집
- Side B 2. 신행일 – 울긴 왜 울어
- Side B 3. 라나에로스포 – 사랑해
- Side B 4. 신행일 – 청춘을 돌려다오
- Side B 5. 조애희 – 그 사람 바보야
이학춘은 Side A의 첫 세 곡을 연속으로 맡았다. 그 가운데 ‘이별의 영시’가 첫 곡이자 음반의 표제곡이었다. 반대편 첫 곡에는 신행일의 ‘선술집’을 놓아 두 사람의 노래를 음반의 앞뒤 대표곡으로 삼았다.
실물음반 판매자료에도 성음, 1971년이라는 정보와 함께 이 수록순서가 그대로 남아 있다. 따라서 후대 선집이 아니라 1971년 당시 원반에서 ‘이별의 영시’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배호의 ‘영시의 이별’보다 먼저 나온 노래
‘이별의 영시’를 특별하게 만드는 기록은 이 노래가 배호의 유명한 ‘영시의 이별’보다 앞서 등장했다는 데 있다.
이학춘의 음반은 성음 DG-가-39로 1971년 6월 1일 발매된 것으로 정리돼 있다. 반면 배호의 ‘영시의 이별’은 같은 1971년 후반의 작품으로, 연합뉴스가 정리한 작곡가 배상태의 작품세계에서도 배상태와 배호가 함께 만든 1971년 작품으로 소개된다.
두 노래는 제목의 어순만 바뀐 정도가 아니다. 이학춘의 ‘이별의 영시’를 이철수 작사·허현 작곡으로 기록하는 자료가 있고, 이후 배호가 부른 ‘영시의 이별’은 이철수 작사·배상태 작곡으로 남아 있다.
이학춘의 옛 음반과 활동을 정리한 한국가요 아카이브 자료에도 1971년 ‘이학춘·신행일 – 이별의 영시 / 선술집’ 음반과 ‘이별의 영시’가 이학춘의 노래로 기록돼 있다.
‘이별의 영시’에서 ‘영시의 이별’로
두 작품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전하는 후대 가요자료에서는 이학춘의 ‘이별의 영시’를 배호 ‘영시의 이별’의 선행곡으로 설명한다.
이학춘의 음반사를 정리한 자료는 이학춘이 1971년 ‘이별의 영시’를 먼저 불렀으며, 당시 작품을 이철수 작사·허현 작곡으로 기록한다. 이어 배호가 부를 때는 이철수의 노랫말 일부를 손질하고 배상태의 곡으로 발표됐다고 전한다.
배호판의 기록은 보다 분명하게 남아 있다. 벅스의 배호 ‘영시의 이별’에서 확인되는 노래는 자정 무렵 네온불이 꺼져가는 삼거리와 밤안개 낀 길을 배경으로 한다. 헤어지는 두 사람은 지난 사랑을 뒤로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영시’에 자신들의 이별을 겹쳐 놓는다.
다만 이학춘판과 배호판의 제작과정에 관한 동시대 기사나 계약자료가 충분히 공개돼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두 곡이 완전히 동일한 원곡과 리메이크라는 식으로 단순화하기보다는, 이학춘의 선행곡이 있었고 같은 작사가 이철수의 노랫말을 바탕으로 배호의 ‘영시의 이별’이 다른 작곡가 배상태의 작품으로 이어졌다는 후대 기록이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현재 자료에 가장 가깝다.
이학춘보다 배호의 제목이 더 오래 기억됐다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훨씬 널리 남은 제목은 배호의 ‘영시의 이별’이었다.
배호와 배상태는 이미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 ‘황토십리길’, ‘능금빛 순정’, ‘비겁한 맹서’ 등을 함께 만들었던 관계였다. 배상태는 훗날 인터뷰에서도 배호의 넓은 음역과 표현력을 높이 평가했다. 연합뉴스의 배상태 부고기사 역시 두 사람이 ‘마지막 잎새’와 ‘영시의 이별’까지 함께했다고 기록한다.
더구나 배호는 1971년 11월 7일 스물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생애 마지막 시기에 ‘마지막 잎새’와 ‘영시의 이별’처럼 이별을 제목에 품은 노래들이 남으면서 이 작품들은 배호의 말년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노래가 됐다.
그 과정에서 먼저 ‘이별의 영시’를 불렀던 이학춘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희미해졌다.
‘괴로워도 웃으며’도 훗날 다른 제목으로 알려졌다
이학춘에게 이런 일은 ‘이별의 영시’ 한 곡으로 끝나지 않았다. 같은 DG-가-39의 Side A 세 번째에는 ‘괴로워도 웃으며’가 들어 있다.
후대에 전하는 가요자료에서는 이 노래 역시 훗날 가사와 제목을 손질해 다른 가수들에게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한민을 거쳐 1980년대에는 정재은이 부른 ‘어차피 떠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사연이다.
‘괴로워도 웃으며’의 전승과정을 정리한 자료에서도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동시에 이학춘의 ‘이별의 영시’가 훗날 배호의 ‘영시의 이별’로 이어진 사례를 함께 언급한다.
이 때문에 1971년 DG-가-39의 앞면은 지금 다시 살펴볼 이유가 있다. 첫 곡 ‘이별의 영시’와 세 번째 ‘괴로워도 웃으며’ 모두 이학춘보다 뒤에 다른 가수가 부른 형태가 더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팔도기생’도 불렀던 이학춘
이학춘은 ‘이별의 영시’ 한 곡만 남긴 가수는 아니었다. 현재 ManiaDB 이학춘 자료에는 ‘사랑의 돌부처’, ‘괴로워도 웃으며’ 등이 함께 남아 있고, 다른 1971년 음반에서는 ‘잊으려도’, ‘낙동강 나그네’ 등을 불렀던 흔적도 확인된다.
또 당시 자료에는 ‘네 글자’, ‘한번만 말해주오’, ‘팔도기생’, ‘두 글자’ 같은 레퍼토리도 나타난다. 김부자의 노래로 알려진 ‘팔도기생’을 이학춘이 다시 부른 흔적까지 있어, 당시 여러 음반사를 오가며 상당한 수의 노래를 취입했던 가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학춘의 이름을 지금까지 가장 흥미롭게 붙잡아 주는 노래 가운데 하나는 역시 ‘이별의 영시’다. 그 이유는 이 노래 자체의 음반기록과 함께 몇 달 뒤 등장한 배호의 노래가 있기 때문이다.
1971년 두 개의 ‘영시’가 남긴 기록
1971년 6월 1일 성음 DG-가-39의 첫 홈에는 이학춘의 ‘이별의 영시’가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대중은 배호의 ‘영시의 이별’을 만나게 된다.
배호의 노래에서는 네온불이 꺼지는 삼거리, 깊은 밤안개, 자정을 뜻하는 영시가 이별의 순간을 만든다. 사랑이 끝나고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0시’에 빗댄 노랫말은 이후 배호의 대표적인 후기 레퍼토리로 남았다.
그 유명한 노래의 앞쪽을 따라가다 보면 이학춘이라는 가수와 ‘이별의 영시’라는 제목을 만나게 된다. 성음의 음반번호와 실물 LP까지 남아 있어 이 노래가 배호의 유명세에 기대어 후대에 만들어진 제목이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된다.
이학춘의 ‘이별의 영시’는 그래서 조금 특별한 옛 노래다. 1971년 6월에는 이학춘의 이름을 앞세운 음반의 첫 곡이었지만,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의 기억에는 어순을 바꾼 배호의 ‘영시의 이별’이 훨씬 크게 남았다. 두 노래 사이에 남은 작사가 이철수의 이름과 서로 다른 작곡가의 기록을 함께 살펴보면, 한 노래가 취입과 개작을 거치며 다른 가수의 대표 레퍼토리로 이어지기도 했던 당시 가요계의 한 단면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