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피리 – 선우영 –

‘풀피리’와는 정반대의 풍경

같은 선우영이 연이어 부른 두 곡이지만 ‘풀피리’와 ‘슬픔만 남겼는데’의 풍경은 크게 다르다.

‘풀피리’에는 산딸기와 머루가 익는 산길, 소를 몰며 풀피리를 부는 목가적인 풍경이 있다. 지나간 사랑을 떠올리지만 기억 속에는 함께 손을 잡고 속삭였던 따뜻한 시절이 남아 있다.

그 다음 곡 ‘슬픔만 남겼는데’로 넘어가면 풍경은 갈림길과 이슬비로 바뀐다. 사랑은 이미 상처와 미련이 됐다.

두 곡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도록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없지만, 같은 가수의 두 작품을 LP 첫머리에 연속 배치하면서 서로 다른 그리움의 장면이 이어지게 됐다.

2006년 베스트음반에도 다시 실린 노래

‘슬픔만 남겼는데’는 1971년 원반에서 끝나지 않았다. 2006년 ‘선우영 Best 1 – 박시형 작곡집’에도 ‘풀피리’, ‘생각을 말아야지’, ‘능금꽃 피는 산골’, ‘못잊을 사랑’ 등과 함께 수록됐다.

또 1982년 ‘선우영 히트곡 모음집’에도 이 작품이 들어 있다. 후대의 선우영 레퍼토리를 정리할 때 계속 선택된 노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런 후대 선집의 날짜는 원곡의 발표시점이 아니다. 출발점은 1971년 6월 성음 SEL-707이다.

선우영의 ‘슬픔만 남겼는데’는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옛정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나이를 노래한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른 선우영은 바로 이 LP를 ‘박시형 작곡 2집’으로 내놓은 작곡가 박시형 자신이었다. 한 장의 음반에서 작곡가의 이름과 가수의 예명이 나란히 만나는, 1971년 성음제작소의 흥미로운 기록이다.

선우영의 ‘풀피리’는 1971년 6월 15일 성음제작소 SEL-707 ‘박시형 작곡 2집 – 풀피리 / 여자만이 가는 길’의 Side A 첫 곡이자 음반의 대표곡이다. 박시형이 직접 노랫말을 쓰고 곡을 만들었으며, 선우영이라는 예명으로 노래까지 불렀다. 산딸기와 머루가 익는 산길에서 함께 풀피리를 불던 사람을 떠올리는, 목가적인 풍경의 그리움 노래다.

성음제작소 음반번호 자료에는 SEL-707이 ‘박시형 작곡 2집 [풀피리 / 여자만이 가는 길]’로 기록돼 있으며 발매일은 1971년 6월 15일이다. ‘풀피리’ 원반자료에서는 박시형 작사·작곡이라는 정보와 전체 수록곡도 확인할 수 있다.

선우영 ‘풀피리’, 작곡가 박시형이 직접 부른 표제곡

선우영은 작곡가 박시형이 자신의 노래를 부를 때 사용한 이름이다. ManiaDB의 선우영 활동자료에는 그가 1960년대부터 박시형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가수의 작품을 만들고, 선우영이라는 예명으로 ‘능금꽃 피는 산골’을 비롯한 자신의 노래를 취입했던 과정이 남아 있다.

박시형 작곡 1집에서는 ‘노을진 비탈길’과 유정의 ‘사랑하고 미워하고’를 중심으로 작품을 묶었고, 뒤이어 낸 작곡 2집에서는 자신의 노래 ‘풀피리’를 맨 앞에 내세웠다.

반대편 첫 곡은 백성희의 ‘여자만이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음반 제목도 자연스럽게 ‘풀피리 / 여자만이 가는 길’이 됐다.

산딸기와 머루가 익던 산길

ManiaDB에 전하는 ‘풀피리’ 노랫말을 보면 이 작품은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는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산딸기가 익어가는 뒷동산에서 두 사람은 풀피리를 꺾어 불며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흐른 지금 화자는 그때를 떠올리며 혼자 소를 몰고 풀피리를 분다.

또 다른 기억은 머루가 익는 산길이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이제 화자의 곁에는 그 사람이 없다. 혼자 옛 노래를 부르며 지나간 시간을 되새길 뿐이다.

노래는 헤어진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상대가 어디로 떠났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산딸기, 머루, 산길, 소, 풀피리 같은 농촌의 풍경을 통해 함께했던 시간이 이미 과거가 됐음을 보여준다.

선우영의 이름으로 오래 남은 노래

‘풀피리’는 이후 선우영의 대표 레퍼토리를 모을 때 반복해서 선택됐다.

1982년 ‘선우영 히트곡 모음집’에서는 아예 첫 번째 곡으로 수록됐고, 2006년 ‘선우영 Best 1 – 박시형 작곡집’에서도 다시 첫 곡을 차지했다.

후대 선집에서 계속 첫머리에 놓였다는 사실은 적어도 선우영 자신의 레퍼토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작품이 중심곡으로 취급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원곡의 출발점은 1982년이나 2006년이 아니라 1971년 SEL-707이다.

‘능금꽃 피는 산골’과 이어지는 목가적 풍경

선우영의 다른 작품 ‘능금꽃 피는 산골’ 역시 정든 고향과 옛 친구를 떠올리는 노래다. Apple Music 선우영 자료와 후대 베스트음반에는 ‘능금꽃 피는 산골’과 ‘풀피리’가 함께 남아 있다.

두 노래에는 산골과 과실나무, 친구 또는 옛사랑을 떠올리는 기억이 공통으로 등장한다. 도시의 네온이나 밤거리보다 시골의 산길과 자연을 무대로 삼았던 선우영의 한쪽 레퍼토리를 보여준다.

선우영의 ‘풀피리’는 화려한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산딸기와 머루가 익던 시절, 둘이 손을 잡고 걸었던 길, 풀피리를 불며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화자는 같은 산길에서 홀로 풀피리를 분다. 1971년 박시형 작곡 2집의 첫 홈에 놓였던 이 노래는 그렇게 선우영, 곧 작곡가 박시형 자신의 대표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로 오래 남았다.

유정의 ‘내마음 왜 이럴까’는 1971년 6월 15일 성음제작소 SEL-707 ‘박시형 작곡 2집 – 풀피리 / 여자만이 가는 길’의 Side A 세 번째 곡이다. 오석광이 노랫말을 쓰고 박시형이 곡을 만든 것으로 원반자료에 전하며, 자신을 싫다며 떠난 사람을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잊지 못해 스스로에게 ‘내 마음은 왜 이럴까’라고 묻는 이별가다.

SEL-707 원반자료에서 유정은 ‘내마음 왜 이럴까’와 ‘해당화 사연’ 두 곡을 연속으로 맡는다. 앞에는 선우영의 ‘풀피리’와 ‘슬픔만 남겼는데’, 뒤에는 선우영아의 ‘비오는 밤에 떠난 사람’과 ‘여자의 길’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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