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정거장 – 이미자 –

이미자 ‘새벽 정거장’, 배호와 한 장의 음반을 나누다

JLS-120479는 가수 배치가 매우 선명한 음반이다. 앞면 다섯 곡은 배호, 뒷면 다섯 곡은 이미자가 부른다.

배호는 ‘울고 싶어’, ‘비 내리는 경부선’, ‘조용한 이별’, ‘이 순간이 지나면’, ‘무엇하러 왔을까’를 맡았다. 이미자는 ‘새벽 정거장’, ‘돌아가는 삼각지’, ‘그대를 보내놓고’, ‘안개 낀 장충단공원’, ‘강변에 살고 싶어’를 불렀다.

ManiaDB의 원반 수록정보에서도 이 구성이 확인된다.

특히 이미자가 배호의 대표 레퍼토리인 ‘돌아가는 삼각지’와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함께 부른 점이 눈에 띈다. 배상태라는 작곡가를 중심으로 배호의 노래와 이미자의 목소리를 한 장의 LP에서 만나게 한 것이다.

안개 짙은 새벽, 떠나는 사람을 보내다

‘새벽 정거장’의 이야기는 한 장소에 집중된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새벽, 정거장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다.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 미워서 보내는 것도 아니고 사랑이 식어서 보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떠나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따라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더욱 아픈 것은 이번에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화자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벅스의 ‘새벽 정거장’에 남은 노랫말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이유를 미움이나 싫증으로 돌리지 않고, 따라갈 수 없는 슬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배상태가 만든 또 하나의 ‘정거장’ 풍경

‘새벽 정거장’은 배상태의 작품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국가자료종합목록에는 예술자료 가운데 ‘새벽 정거장 / 배상태 작곡’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배상태의 대표작을 떠올리면 도시와 이동의 풍경이 자주 나타난다. 삼각지, 장충단공원, 경부선 같은 구체적인 장소와 이동의 이미지가 노래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새벽 정거장’도 같은 계열의 공간을 갖는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정거장이며, 시간은 새벽이고, 시야에는 안개가 깔려 있다. 짧은 제목 안에서 이별 장면이 거의 완성된다.

배호의 노래를 부른 이미자

이 음반에서 이미자는 ‘새벽 정거장’만 부른 것이 아니다. 배호의 대표곡 ‘돌아가는 삼각지’와 ‘안개 낀 장충단공원’, 그리고 ‘강변에 살고 싶어’도 불렀다.

당시 작곡가 중심의 음반에서는 한 가수가 먼저 알려놓은 노래를 다른 가수의 목소리로 다시 싣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배상태 작곡집이라는 성격을 생각하면 이 음반 역시 작곡가의 작품세계를 배호와 이미자라는 두 가수의 목소리로 나누어 보여주는 구성이었다.

그래서 ‘새벽 정거장’은 단순히 이미자의 수많은 수록곡 가운데 하나로만 보기보다 배상태-배호-이미자가 한 장의 LP에서 만난 1971년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1971년 5월 20일, 두 목소리가 마주 본 LP

이 음반의 앞면에 바늘을 올리면 배호의 ‘울고 싶어’가 시작됐다. 다섯 곡을 모두 듣고 레코드를 뒤집으면 이번에는 이미자의 ‘새벽 정거장’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목소리를 지녔지만 배상태의 노래라는 공통점으로 한 장의 음반에 묶였다. 그리고 음반 제목은 각 면의 첫 곡을 하나씩 골라 ‘울고 싶어 / 새벽 정거장’으로 정해졌다.

이미자의 ‘새벽 정거장’은 그렇게 Side B의 문을 열었다. 안개가 짙은 새벽, 떠나는 사람을 따라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여인이 정거장에 남는다. 사람을 태운 열차는 떠나지만 보내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배상태가 만든 이 짧은 이별의 풍경을 이미자가 노래했고, 그 맞은편 면에는 생애 마지막 해를 보내던 배호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Similar Posts

  • 불타는 이십대 – 나훈아 –

    나훈아 ‘불타는 이십대’, 젊은이에게 말을 거는 노래 ‘불타는 이십대’의 노랫말은 당시의 다른 이별 노래들과 성격이 다르다. 사랑했던 사람을 붙잡거나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대신 젊은이 자체를 이야기한다. 노래는 젊은 사람을 철없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고 한다. 젊기 때문에 실수할 수도 있지만 넘어지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청춘의 시행착오를 바라본다. 성장 과정을 설명하는 친근한 비유도 등장한다. 작은…

  • 가야만 할사람 – 박태규 –

    박태규의 ‘가야만 할사람’은 1971년 봄 오아시스레코드의 혼합가수 LP에서 앞면 첫 곡으로 배치된 노래다. 오늘날 음원 서비스에서는 박태규의 정규앨범처럼 분류되기도 하지만, 실제 수록 구성을 보면 강연숙·이영숙·박건·조미미·신호·정훈희·나훈아 등이 함께 참여한 당시식 합집 음반에 가깝다. 이 곡의 위치를 이해하려면 후대 디지털 분류보다 당시 음반번호를 함께 보는 편이 정확하다. 오아시스 음반 목록에는 OL-913 박태규·강연숙 《가야만 할 사람 / 그날…

  • 조국의 찬가 – 서수남·현혜정 –

    ‘조국의 찬가’는 음반의 마지막 곡이었다 당시 수록순서를 정리한 자료에서는 Side B가 ‘얄미운 사람’, ‘나 혼자 걷는 길’, ‘독불장군’, ‘철날때도 됐지’, ‘조국의 찬가’ 순이다. 따라서 ‘조국의 찬가’는 Side B 5번으로 한 장의 음반을 닫는 역할을 했다. 원반 수록순서 보기 벅스의 복원 앨범에서도 같은 곡이 확인되며 디지털 순서로는 여덟 번째에 배치돼 있다. 복원 앨범 전체 보기 후대…

  • 그리운 여인 – 배일 –

    배일 ‘그리운 여인’, 한 장의 LP에 남은 이름 OL-940 실물음반 자료에서도 Side B 네 번째에 ‘그리운 여인 – 배일’이 확인된다. 현재 공개된 디지털 자료에서 배일의 상세한 경력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동명이인이나 후대 가수의 이력을 가져와 1971년의 배일에게 붙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확실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리운 여인’이라는 작품과 1971년 오아시스 합동음반이다. ‘오지 않을…

  • 동물농장 – 쉐그린 –

    쉐그린 ‘동물농장’, 원곡은 따로 있었다 ‘동물농장’을 쉐그린의 노래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 곡을 쉐그린의 순수 창작곡으로 보기는 어렵다. 쉐그린이 부르기 전 이미 서수남·하청일과 관련된 음반에서 같은 계열의 노래가 확인된다. 아리랑 브라더스 복각 음반자료에는 서수남과 하청일이 결성했던 아리랑 브라더스의 초기 레퍼토리 가운데 ‘동물농장’이 포함돼 있다. 아리랑 브라더스 옛 LP 자료에서도 이 작품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 사랑해요 당신을 – 쉐그린 –

    쉐그린 ‘사랑해요 당신을’, KLS-14의 첫 곡 ManiaDB의 KLS-14 음반자료에서 ‘사랑해요 당신을’은 Side A 첫 번째에 기록돼 있다. 이어 ‘그리움’, ‘미련’, ‘침묵의 소리’, ‘철새는 날아가고’가 나온다. 음반 제목도 ‘사랑해요 당신을 / 동물농장’이었다. 따라서 ‘사랑해요 당신을’은 여러 수록곡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LP의 한쪽 면을 대표하도록 선택된 노래였다. 당시 쉐그린은 이태원과 전언수로 이루어진 듀오였다. 두 사람이 함께 노래하던…

guest

0 Comments
오래된순
최신순 추천순